핀란드의 어떤 석사과정 학생

1970년, 헬싱키의 한 대학교에서 한 석사과정 학생이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Seppo Linnainmaa. 우리가 지금 ChatGPT를 쓸 수 있는 이유, 구글 번역기가 작동하는 이유, 자율주행차가 가능한 이유의 핵심 기술을 그가 발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발명한 것은 ‘역전파(Backpropagation)’라는 알고리즘이었다.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방법의 핵심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1986년에 이를 ‘재발견’한 Rumelhart, Hinton, Williams를 발명자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발명과 발견 사이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일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진짜 발명자는 잊히고, 그것을 대중화한 사람이 발명자로 기억되는 일 말이다. 마치 어떤 무명 작가가 쓴 소설을 유명한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했더니 그 출판사 대표가 작가로 불리는 것과 같다.

Linnainmaa의 1970년 논문은 핀란드어로 쓰여 있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핀란드 헬싱키 대학교의 석사논문을 누가 읽었겠는가.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그 논문은 신경망이 아닌 ‘자동 미분의 역방향 모드’라는 수학적 개념을 다루고 있었다.

반면 1986년 Rumelhart와 동료들의 논문은 달랐다. 영어로 쓰여 있었고,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며, 무엇보다 ‘신경망’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뤘다. 사람들은 이 논문을 읽고 “오, 이게 바로 인공 뇌가 학습하는 방법이구나!”라고 생각했다.

16년의 시차

Linnainmaa가 역전파를 발명한 1970년과 Rumelhart 등이 이를 신경망에 적용해 유명해진 1986년 사이에는 16년의 시차가 있다. 16년이면 한 세대가 지나는 시간이다.

1970년에 컴퓨터는 몇 억 배나 비쌌다. 일반적인 연구실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였다. Linnainmaa의 발명은 그저 이론적 가능성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헬리콥터를 설계했지만 엔진이 없어서 날 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1986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했고, 연구실에서도 실험이 가능해졌다. Rumelhart 팀은 역전파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론이 아닌 결과를 원했다. 그리고 결과를 보여준 사람을 발명자라고 불렀다.

인용의 정치학

더 흥미로운 건 Rumelhart 등의 1986년 논문이 Linnainmaa의 1970년 논문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면? 후속 논문들에서도, 서베이 논문들에서도 여전히 인용하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과학계에는 묘한 정치학이 존재한다.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혁신적인지 보여주려면, 선행 연구는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게 유리하다. 특히 그 선행 연구가 핀란드어로 쓰인 무명의 석사논문이라면 더더욱.

브랜딩의 힘

과학도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복잡한 역사보다는 간단명료한 서사를. “세 명의 천재 과학자가 인공지능의 학습 방법을 발명했다”는 이야기가 “핀란드의 어떤 석사과정 학생이 1970년에 발명한 걸 16년 후에 누군가 신경망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Hinton 같은 사람들은 이미 유명한 과학자였다. 언론에서도 주목했고, 그들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반면 Linnainmaa는 아무도 모르는 핀란드 사람이었다.

브랜딩의 힘이다. 같은 햄버거라도 맥도날드에서 파는 것과 동네 분식점에서 파는 것의 인지도가 다른 것처럼, 같은 발명이라도 누가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달라진다.

언어의 장벽

핀란드어. 전 세계 500만 명이 쓰는 언어다. 서울시 인구의 절반 정도다. 아무리 중요한 발견이라도 핀란드어로 쓰여 있으면 세상이 알기 어렵다.

과학은 국제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영어가 지배하는 세계다. 영어로 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Linnainmaa의 1970년 논문이 만약 영어로 쓰여 있었다면? 아마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는 지식의 국경이다. 그 국경을 넘지 못한 발견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타이밍의 아이러니

2010년,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깊은 신경망을 훈련시키려면 복잡한 사전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순수한 역전파만으로 깊은 신경망을 훈련시키자고 제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Jürgen Schmidhuber의 팀이 그 ‘제정신이 아닌’ 일을 해냈다. 순수한 역전파만으로도 깊은 신경망을 훈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0년 Linnainmaa의 원래 아이디어가 4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40년 동안 사람들은 역전파의 ‘한계’를 논했는데, 정작 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였다.

진실을 찾는 사람들

다행히 Schmidhuber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는 끈질기게 과학사의 진실을 파헤쳤다. Linnainmaa의 1970년 논문을 발굴해냈고, 역전파의 진짜 역사를 밝혀냈다.

“과학은 자기 교정에 관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혀야 한다. 발명자는 발명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 하고, 대중화한 사람은 대중화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실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기득권이 있고, 관성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다. 이미 굳어진 역사를 바꾸는 것은 거대한 바위를 옮기는 일과 같다.

현재의 풍경

지금 우리가 쓰는 모든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 TensorFlow, PyTorch, 그 모든 것들이 Linnainmaa의 1970년 방법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지금의 AI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ChatGPT를 쓰는 수억 명의 사람들 중에 Seppo Linnainmaa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역사의 각주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힘 있는 자, 목소리 큰 자, 영어를 쓰는 자의 이야기가 남는다.

둘째, 과학도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정치와 권력, 브랜딩과 마케팅이 작동하는 세계다.

셋째,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끈질기게 파헤쳐야 한다. Schmidhuber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Linnainmaa는 영원히 잊혀졌을 것이다.

마무리하며

1970년 헬싱키의 그 석사과정 학생은 아마 자신이 세상을 바꿀 기술을 발명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냥 졸업하기 위해 논문을 쓰고 있었을 뿐이다.

55년이 지난 지금, 그의 발명은 온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적다.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과 그 공을 인정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도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Seppo Linnainmaa. 역전파의 진짜 발명자. 이 이름을 기억하자. 그리고 다음에 누군가 “누가 역전파를 발명했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자.

“1970년, 핀란드의 한 석사과정 학생이요.”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