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화가 - 토리야마 아키라의 삶
은둔의 화가 - 토리야마 아키라의 삶
서문
사람이 죽으면 그의 생이 정리된다. 토리야마 아키라가 지난 3월에 갔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다. 그가 그린 손오공은 알지만, 그 손오공을 그린 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었다. 위대한 작품 뒤에 숨은 인간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숨겼다.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세상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세상을 피했다. 명성은 컸지만 그림자는 작았다. 이런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과 같다.
가난한 아이의 연필
1955년 4월 5일, 아이치현 기요스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다. 저녁밥이 없는 날에도 부모는 왈츠를 춰댔다. 아이는 그것을 보았다. 굶주림과 음악이 함께 있는 풍경을.
아이는 그림을 그렸다. 배가 고플 때마다 연필을 잡았다. 종이가 없으면 전단지 뒷면에 그렸다. 욕심이 생기면 그것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 그렸다. 그림 그리기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가난한 집 아이에게 즐거움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림 대회에서 상을 탔다. 『101마리 강아지 대행진』을 그려서였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 주었다. 그때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을.
뒤늦은 시작
토리야마 아키라는 23세가 되어서야 처음 만화를 그렸다. 늦은 나이였다. 그 전까지는 만화에 관심도 없었다. 디자인 회사에서 2년 반 일하다가 그만뒀다. 지각을 자주 했고, 문자 디자인 업무가 싫었다.
어느 날 다방에서 『소년 매거진』을 집어들었다. 신인 작품 모집, 상금 50만 엔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상금을 타기 위해 만화를 그렸다.
첫 작품은 떨어졌다. 하지만 편집자 토리시마 가즈히코가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많이 그리면 뭔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 한 마디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운명을 바꿨다.
아라레와 손오공 사이
1980년, 『Dr. 슬럼프』가 시작됐다. 아라레가 태어났다. 최고 시청률 36.9%를 기록했다. 하지만 토리야마는 지쳤다. 아이디어가 떨어졌다고 했다. 연재를 끝내고 싶어했다.
편집부는 조건을 걸었다. 3개월 후 새 연재를 시작한다면 끝내도 좋다고.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했다. 손오공이 그렇게 태어났다.
『드래곤볼』은 다른 차원의 성공이었다. 전 세계 2억 6천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성공이 그를 더욱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숨었다.
숨은 거장
토리야마 아키라는 인간관계를 피했다. “가족과 친한 친구,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외에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부분의 만화가가 도쿄로 올라가는데, 그는 고향에 남았다. 농촌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의 본명은 펜네임이기도 했다. 처음엔 “어차피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해서 가명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히트한 후 이상한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아이치현에 토리야마 씨가 몇 집 없었기 때문이다. “본명을 쓴 게 만화가가 된 후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고 했다.
가족이라는 피난처
1982년, 그는 소녀만화가 미카미 나치와 결혼했다. 만남의 계기는 장난전화였다. 토리야마가 미카미에게 걸었다가 직업이 신기해서 만나보자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카미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미카미는 “카메하메하”의 이름을 지었다. 하와이 왕국의 카메하메하 대왕에서 따온 것이었다. 토리야마가 기술 이름을 고민할 때 “바보 같고 거북선인다워서 좋겠다”고 했다. 그 말 한 마디가 세계적인 필살기의 이름이 됐다.
세 아이가 있었다. 장남 사스케, 장녀 킷카, 차녀. 킷카는 화가가 됐다. 5세 때부터 재능이 보였다고 했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완벽주의자의 고독
토리야마는 혼자 작업했다. 『Dr. 슬럼프』와 『드래곤볼』을 거의 혼자서 그렸다. 어시스턴트는 주 1회 한 명만 왔다. 동료 만화가들이 놀랄 정도였다. 『슬램덩크』의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놀랐다.
그는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슈퍼 사이어인을 금발로 만든 것도 먹칠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게으름이 오히려 창의성을 낳았다. 제약이 발명을 만들어냈다.
세계를 바꾼 선
그의 그림체는 혁명이었다. 입술의 입체적 표현, 근골격에 기반한 캐릭터 디자인. 많은 만화가들이 그를 따라했다. 『원피스』의 오다 에이이치로는 “신이다. 디즈니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나루토』의 키시모토 마사시는 “드래곤볼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손의 달인 테즈카 오사무도 “토리야마 아키라에게는 못 당하겠다”고 했다. 만화의 신이 인정한 새로운 신이었다.
멈추지 않는 연필
그는 끝까지 그렸다. 68세까지. 2024년 3월 1일,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갔다. 2월에 뇌종양 수술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2023년 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임하던 일이 많았고, 아직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라고 부고에 적혀 있었다. 미완의 꿈들이 그와 함께 갔다.
Epilogue - 남겨진 선들
토리야마 아키라는 죽었지만 그의 선은 살아있다. 손오공은 여전히 싸우고, 슬라임은 여전히 웃는다. 아이들이 그의 캐릭터를 보며 자란다.
그는 자신을 숨겼지만 작품을 통해 영원히 드러났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은둔이 있을까. 세상은 그를 알고 싶어했지만, 그가 남긴 것은 그림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남기는가. 토리야마 아키라는 선을 남겼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선을. 꿈을 키우는 선을. 그 선들이 그의 진짜 생애였다.
2024년 8월, 토리야마 아키라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