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lar

썩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과일

얼마 전 BBC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읽었다. ‘세상이 잊은 중세의 기이한 과일’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양모과(Medlar)라는 과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셰익스피어와 초서가 작품에서 언급했고, 로마 시대부터 중세까지 유럽인들이 즐겨 먹었다는 이 과일을, 나는 전혀 몰랐다.

더 놀라운 건 이 과일의 특성이었다. 양모과는 수확한 직후에는 딱딱하고 떫어서 먹을 수 없다. 몇 주 동안 서늘한 곳에 두고 기다려야 한다. 껍질이 갈색으로 변하고 주름져서 마치 썩은 것처럼 보일 때, 그때서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 그 과정을 ‘블레팅(bletting)’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상한 과일이다. 썩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번거로움이다.

900년간 불린 부끄러운 이름

양모과에는 재미있는 별명이 하나 있다. 무려 900년 동안 ‘open-arse’, 즉 ‘열린 엉덩이’라고 불렸다. 과일 밑부분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개의 엉덩이’, ‘원숭이 엉덩이’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과일을 언급할 때 ‘open arse’라는 표현을 썼다.

이런 이름을 가진 과일이 궁금하지 않은가? 나는 궁금했다. 어떤 맛일까? 정말 바닐라와 사과 버터를 섞은 것 같은 달콤한 맛이 날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다. 수입 과일로도, 재배 과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역설의 시작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과거에 비해 운송과 보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건만, 과거에는 흔했던 과일을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체리를 겨울에도 먹을 수 있고, 열대 과일인 망고를 사계절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에서 수천 년간 재배했던 양모과는 왜 사라졌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양모과 같은 과일을 도태시켰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자는 편의성을 추구한다. 사과처럼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거나, 바나나처럼 껍질만 까면 되는 과일을 선호한다. 몇 주간 기다렸다가 숟가락으로 파먹어야 하는 과일은 그 자체로 마케팅의 재앙이다.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드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상상해보라.

효율성이라는 괴물

현대 농업은 효율성을 추구한다. 연중 생산 가능하고, 대량 수확이 가능하고, 운송과 보관이 용이한 작물만이 살아남는다. 양모과는 늦가을에만 수확할 수 있고, 나무 한 그루당 연간 30-70킬로그램 정도밖에 생산되지 않는다. 사과나 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다.

무엇보다 양모과는 ‘기다림’을 요구한다. 인내를 요구한다. 현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배송은 당일 배송이 기본이 된 시대를 산다. 몇 주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설 자리는 없다.

선택의 역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까다로운 것들은 사라진다. 과거 중세 유럽인들에게 겨울 과일의 선택권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양모과의 번거로운 과정도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 세계 과일을 연중 먹을 수 있는 시대에 굳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양모과를 먹을 이유가 없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비단 과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편지, 필름 카메라, 수동 변속기, 아날로그 시계… 이런 것들은 모두 ‘불편함’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불편함의 미학

양모과를 생각하면 묘한 그리움이 든다.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 ‘기다림’의 미학 때문일 것이다. 썩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파먹는 그 과정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즉석에서 해결하려 한다. 인스턴트 커피, 전자레인지 음식, 패스트푸드… 우리는 속도와 효율성의 포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기다림의 미학, 인내의 가치, 과정 자체가 주는 즐거움.

복원 불가능한 것들

양모과를 되살릴 수 있을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가치관이, 시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모과의 역설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한 번 사라진 것들은 복원하기 어렵다.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겨진 질문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중에서, 50년 후에는 사라질 것들이 얼마나 될까? 종이책? 현금? 수동 운전? 아니면 더 근본적인 것들일까?

양모과의 이야기는 단순히 잊혀진 과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믿는 것들이 때로는 상실을 의미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모든 진보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받고 있는 걸까?

900년간 ‘open-arse’라 불린 그 과일을, 나는 평생 맛볼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조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