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소년의 기억과 2024년 아버지의 실망

얼마 전 한 기사를 읽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를 6세 아들과 함께 방문한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그는 1980년대 어린 시절 그 박물관에서 경험했던 마법 같은 순간들을 아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모래가 담긴 거대한 진자가 탁자 위에 그려내는 예측할 수 없는 무늬들, 실제 크기의 심장 모형 속을 뛰어다니며 혈관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던 그 경험들을 말이다.

하지만 박물관에 도착한 그가 마주한 것은 터치스크린이었다. “로켓을 디자인하세요!”라는 화려한 문구와 함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모니터들. 아들은 당연히 그쪽으로 달려갔고, NASA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아내조차 그 ‘로켓 디자인 게임’을 몇 분 만지다가 “이건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며 아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의 글은 단순한 개인적 불만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박물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편리함이라는 덫에 빠진 박물관들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최근 방문했던 몇몇 국내 박물관들을 떠올렸다. 어느 과학관에서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길래 뭔가 했더니,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의 우주여행을 하는 체험이었다. 5분 남짓한 짧은 영상을 보기 위해 30분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든 생각은 “이걸 굳이 여기서 해야 하나?”였다.

박물관이 스크린으로 채워지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물리적 전시물은 고장이 잦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 아이들이 매일 수백 번씩 만지고 돌리고 누르다 보면 어지간한 장치는 금세 망가진다. 반면 터치스크린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콘텐츠 업데이트도 소프트웨어만 바꾸면 된다. 예산이 빠듯한 박물관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착각이 있다. 박물관의 가치를 ‘정보 전달’로만 보는 시각이다.

손끝으로 느끼는 것과 화면으로 보는 것의 차이

Hacker News라는 기술자들의 커뮤니티에서도 이 기사에 대한 흥미로운 토론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개발자들조차 무분별한 디지털화를 비판하고 있었다. 한 댓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용 인터랙티브 전시물을 직접 만드는 사람으로서, iPad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이라면 박물관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터치스크린을 만지는 것과 진짜 도르래를 당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스크린이 주는 피드백은 소프트웨어가 만든 시뮬레이션이지만, 도르래를 당길 때 손에 느껴지는 저항감은 중력과 마찰력이라는 우주의 실제 법칙이다. 이 차이를 아이들이 몸으로 느끼느냐 마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어떤 부모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은 스크린에 익숙하니까 그에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논리다. 온 세상이 스크린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박물관만이라도 다른 종류의 경험을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디지털 트윈 시대의 역설

우리는 지금 디지털 트윈과 가상현실의 전성시대를 살고 있다. 제조업체들은 실제 공장을 만들기 전에 가상공간에서 모든 것을 시뮬레이션한다. 의대생들은 가상현실로 수술을 연습하고, 건축가들은 VR로 건물을 미리 걸어볼 수 있다. 기술 자체는 놀라운 발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실물과의 접촉이 더욱 소중해진다. 아이들이 흙을 만지고, 나무에 오르고, 실제 재료로 무언가를 만드는 경험 말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혀 즉석에서 창의적 해결책을 찾는 능력은 미리 프로그래밍된 선택지만 제공하는 가상환경에서는 기를 수 없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주말에 아이들과 무엇을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게임과 유튜브가 워낙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해도 “재미없어”라는 반응을 듣기 일쑤다. 부모 입장에서도 집에서 스크린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는 지혜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크린을 치워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술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박물관에서 스크린이 실물 전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유물 옆에 설치된 화면이 그 유물이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복잡한 과학 원리를 시각적으로 설명해준다면 말이다.

문제는 스크린 자체가 전시의 중심이 되어버릴 때다. 그럴 바에야 집에서 앱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작은 변화부터 시작할 수는 있다. 집에서라도 가끔은 레고나 블록 같은 조립 놀이를 함께 해보고, 요리나 베이킹을 통해 재료의 변화 과정을 관찰해보는 것. 동네 산책을 하면서 나뭇잎이나 돌멩이를 주워와 뭔가 만들어보는 것.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를 경험할 권리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기사를 쓴 아버지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들을 박물관에 스크린을 보러 데려온 것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진짜 세상의 무게와 질감을 느끼기를 원했다. 2천 년 된 조각상 앞에 서서 시간의 무게를 체감하고,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 감탄하는 경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은 어떤 가상현실로도 대체할 수 없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스크린 너머의 세계와 손끝으로 직접 만지는 현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인정하고,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박물관은 여전히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그 소중함을 지키는 일, 그것은 단순히 구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경험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이다.